조선총독부를 짓는데 걸린 시간과 비용 그리고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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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를 짓는데 걸린 시간과 비용 그리고 철거


2024. 3. 21.

 

1.조선총독부

일제강점기에 합병된 조선의 통치행정기관인 조선총독부 소재였던 건물이다.

8.15 광복 이후에는 '중앙청'이라고 불렸으며, 정부 수립 직후에 대한민국 정부 청사와 국회의사당으로 활용됐다. 이후 국회의사당은 1950년 부민관으로 이전했다가 1975년에 준공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이전했고, 정부 부처들도 정부중앙청사나 정부제2종합청사로 이전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1995년에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일환으로 철거됐다. 첨탑과 몇몇 부재들은 남겨 독립기념관에 전시했다.





2.건물의 특징


이 건물의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앞부분을 밀어버리고 지은 건물이라는 데에 있다.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과 주변 행각을 모두 철거해버린 자리에 지었다. 정문인 광화문도 마찬가지로 완전히 철거될 처지였으나, 반대 여론에 부딪혀 건춘문 북측으로 옮겨 지어져 다행히 살아남았다. 이 때문에 궁궐의 중심인 근정전 일원의 정문인 근정문 코앞까지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서 뒷부분을 가로막는 형태가 되어버렸고, 경복궁 뒷편 북악산과의 미적 조화도 깨져 답답하고 위압적인 형상이 되었다.

그 외로는, 조선에서 세 번째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건물이기도 하다. 건축에는 당시엔 최신 문물이었던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그 철근은 일본 코쿠라(구 야하타시) 및 오사카에서 구해왔다. 외벽 표면은 창신동 채석장에서 캔 화강암을 썼고, 대리석은 황해도 금천, 평양, 원산에서, 모래 및 자갈은 한강에서 각각 구해오고 시멘트는 오노다시멘트 제품을 썼으며, 장식철물, 문철물, 가구, 공예품 등은 미국과 유럽에서 수입해 왔다. 당시 기준으로서는 매우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외적으로는 서구 바로크 양식 건물에 잘 쓰이는 구리 돔 지붕이 인상적이었다. 돔 지붕의 외장재로 외국산 구리 동판 2만 4800근(1만 4880 kg)이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건설 직후에는 붉은 구릿빛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녹슬어 그럴싸한 청동색 지붕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건물형은 위 사진과 같이 날일(日)자 모양으로 건설되었다. 여기엔 일본이 조선의 정기를 억누르기 위해 서울에 박아 넣은 '日本' 글자의 '日'에 해당한다는 풍설이 있었다. 실제로 건물을 위에서 보면 '日'자 모양으로 생겼다. 당시 일본인들도 이 떡밥을 좋아했는지 당대 일제의 3개 중추인 일본 국회의사당,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가 모두 '日'자 형태로 생겨 제국주의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낭설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일부러 경복궁 자리에 두어 일제의 통치를 선전하고 조선 왕조를 욕보이기는 했지만 풍수지리적 이유가 반영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일제는 조선의 풍수지리를 미신이라며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건축물들을 위에서 보면 중간에 빈 공간이 있는 경우가 많다. 독일 국회의사당이나 웨스트민스터 궁전을 포함해서 이외 많은 건물에서 마치 건물이 벽과 같이 주위를 두르고 있는 형태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날일자 모양이 그리 특이한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저 설계 자체는 독일 국회의사당이나 웨스트민스터가 아니라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공공건축물 설계를 도입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국회의사당과 구 일본군 대본영육군부 건물인데, 이 둘까지 해서 그야말로 세쌍둥이같은 설계 구조다. 즉 요약하자면 풍수지리로 기를 누른다는 것 자체는 낭설이지만, 당시 일본 대형 공공건축의 날 일(日)자 설계는 분명 국가주의의 형식을 띠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3.철거

맨 처음에 해체가 논의된 것은 6.25 전쟁 중이었던 1.4 후퇴 이후에 막 서울을 수복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의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사람은 육군 공병감 엄홍섭과 육군 참모총장 백선엽이었는데, 당시 공병대에서는 "이렇게 막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라고 난색을 표했고 백선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군에게 불도저 4대를 빌려오긴 했는데 중장비는 그게 고작이었고 기껏해야 지게꾼들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고 폭파라도 시켜서 억지로 없앤다 해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당시는 모든 정부 재정과 수입 물자를 미국 원조에 의존할 때였다. 운전수는 교육시킨다 해도 불도저도 빌려와야 하고, 트럭도 빌려와야 하고, 기름도 얻어와야 하고, 공구와 작업복도 얻어와야 하고, 삼시세끼 급식도 얻어먹어야 하고. 글자 그대로 한국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게 국민의 맨몸뿐이고 그거 빼고 모든 게 미국 원조이다 보니 사정이 저랬다. 다른 복구 사업을 제쳐두고 인력과 정과 망치와 지게로 우공이산을 하겠다면 아주 못할 것까진 아니었겠지만, 전후 잿더미가 된 서울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큰 건물이어서 부수는 데 예산 쓰고 정부 청사로 쓸 새 건물을 근처에 짓는 데 예산 써야 하는데 그것도 낭비이니 결국 포기했다.

철거는 미뤄졌지만 쓰기에도 영 찜찜했기 때문에 2공화국 시절까지도 공식 정부 청사로 쓰지 않고 방치했다. 1962년에 재개관된 것도 전적으로 중앙청 건물을 개보수해서 쓰면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로 1970년대까지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에 대한 논의는 지지부진했다가 1982년 과천으로 정부 기능이 부분 이전하는 김에 이때까지도 정부 청사로 쓰였던 조선총독부 청사도 철거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박물관으로 쓰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민주화 이후 경복궁 복원 계획이 확정되면서 다시금 중앙청 건물 철거 논의가 나왔다. 1991년에 노태우 대통령이 중앙청 철거를 지시했다. 이 때 일본 근대 건축사 연구단체 '메이지 건축 연구회'가 "양국 간에 불행한 역사긴 하지만, 동아시아 근대 건축물 역사상 가치가 높은 건물"이라고 하여 보존을 촉구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 사실이 공분을 사 한국의 여론이 악화되는 바람에 철거 찬성 여론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후 노태우 정부의 비서진이 바뀌면서 철거는 또 다시 유야무야됐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다시 해체 계획이 입안됐다. 이 해체 결정에도 후술될 많은 국내외적인 논쟁이 일어났으나 결국 해체가 결정됐다.

1995년 3월 1일 오전 10시에 정부는 구 총독부 앞 광장에서 '광복 50주년 3.1절 기념 문화 축제'를 열어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옛 총독부 건물을 헐어낸다고 선포했다. 이날 선포식에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경과 보고를 통해 "오늘 삼일절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의 시발점으로 삼는다."라고 천명했다. 정 관장은 이어 "8월 15일까지 철거 실측 작업을 마친 뒤 광복절을 기해 총독부 건물 중앙돔의 첨탑을 끊어낸 뒤 내년 초까지 철거를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거기에 경복궁 복원 계획도 같이 천명했다.



드디어 8월 15일 광복절 오전 9시, 옛 총독부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장에서 중앙돔 첨탑 분리에 앞서 주돈식 문화체육부 장관은 해방 50년 만에 이뤄지는 일제 상징의 제거를 호국 영령들에게 고하는 고유문을 낭독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겨레의 생존까지 박탈했던 식민 정책의 본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여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통일과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정궁 복원 작업과 새 문화 거리 건설을 오늘부터 시작함을 엄숙히 고합니다.



그리고 9시 21분, 커다란 기중기가 첨탑에 구멍을 뚫어 만든 고리에 1인치 굵기의 쇠밧줄 5개를 걸고 서서히 첨탑을 들어올렸다. 첨탑 중에서도 11.4톤짜리 첨탑 윗부분이 먼저 들어올려진 것이다. 첨탑의 일부분이 들어올려지는 순간, 광복절 경축 행사에 모인 5만여 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고 부채를 흔들었고, 그 당시 식민지배를 겪었던 어르신들은 만세를 부르며, 일제 잔재의 청산을 환영했다. 이어 건물 주변에 설치된 수백 발의 폭죽과 불꽃이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첨탑이 기중기에 매달려 지상으로 옮겨지는 동안 광화문 앞 경축 행사장에서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다시 찾은 빛>이 장엄히 울려퍼졌으며 이내 잘려진 첨탑은 15분 만인 9시 35분에 지상으로 완전히 내려졌다. 이러한 모습을 본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누가 저 탑이 잘려나가리라 생각했냐." 하며 "이젠 철거–보존을 둘러싸고 갈라진 국론을 새 민족 박물관 건립으로 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첨탐 철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은 지하 보관소로 옮겼다가 중앙청 바로 옆에 있는 구 국립중앙박물관 사회교육관 건물로 이전되었다. 이후 1996년 초부터 차근차근 압쇄 및 줄톱 공법으로 절단,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철거해 나가 그해 말인 11월 13일 마지막 벽면을 끝으로 철거가 완료되었다. 한편 잘린 첨탑은 1995년 8월 말까지 구 총독부 앞마당에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가 이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70년간 경복궁 뒷편을 가로막고 있던 건물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순수 건물 철거비로 당시 약 47억 원이 소요되었으며, 중앙청 건물의 실측 및 영상 자료, 모형 제작을 합쳐 총 117억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논쟁에 빠져 잊는 것이지만, 관련 비용에서 가장 컸던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비용이다. 1990년대 초에는 대략 1천억대로 예상되었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2005년에 개관했는데 4,100억 원이 들어갔다. 한편 검토되었던 독립기념관 부지로 해체 이전하는 방안에서도 500억 원에 가까운 많은 비용이 소요되리라 추산했다.

조선총독부 철거는 국내의 건설 기술력의 발달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남산 외인아파트와 여의도 라이프빌딩이 폭파를 통해 짧은 시간에 편하게 철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조선총독부는 다이아몬드 와이어쏘 머신 및 굴삭기에 장착된 크라샤를 사용함으로써 주변에 소음, 진동 등의 피해를 주지 않고 철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주택 등을 철거할 때도 브레이커를 사용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크러셔를 많이 쓴다.





4.일본의 반응

철거 결정이 확정된 이후 일본 정부에서 "우리 일본에서 비용을 전액 지불할 테니 통째로 옮겨가겠다." 라고 주장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분노하여 바로 다음 날 조선총독부를 날려버리고 "일본 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하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던 루머가 있다.

사실 이 발언은 당시 일본의 역사 관련 도발이 있었는데, '버르장머리' 발언 1주일 전이던 11월 8일에 전해진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일본 총무성 장관의 발언이 결정적이었다. 에토 장관은 "한일합방 당시 한국은 나라의 힘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단행된 것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한일합방을 통해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한국에 학교도 지어주고, 철도도 만들어주고, 도로도 닦아주지 않았느냐. 창씨개명도 강제로 진행되지 않았다." 라고 했다. 이를 놓치지 않은 김영삼 대통령이 장쩌민 중국 주석과 정상회담을 마친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했던 명언이 그 유명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이다. 시기적으로 건물 해체는 8월 15일부터 시작했고, 저 발언은 석 달 후인 11월 14일에 하였다.

이때 일본 내 웬만한 지한파, 한국통들도 '버르장머리'란 단어를 해석하지 못했다는 후문이 있다. 이 발언 이후 철거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카더라. 다만, 1995년 지방 선거에서 참패하고 한국통신 파업 강제진압을 비롯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지지율 유지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한국갤럽 자료에 의하면 1995년 3분기의 업무 수행에 관한 긍정 지지율은 29%이다.

이 철거에 관한 일본 측의 이야기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며 대한민국 고건축을 연구했던 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 亥治郎)의 책인 《韓의 건축 문화》 증보판 서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쓰여있다. 역자인 이광노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가 쓴 서문인데, 자신이 1984년 교환교수로 일본에 가서 후지시마 가이지로를 만났을 때 후지시마가 "지금 조선총독부 청사를 국립박물관으로 쓰고 있다고 들었다. 총독부 건물 속에 한국의 반만 년 역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스모 선수가 승부에서 지면 상투를 자르듯, 이제라도 그 건물의 상투 부분(돔 부분)을 잘라버려라"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건축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다운 말이다. 다만, 일본인 고건축 학자가 상투 자르듯이 첨탑을 절단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정말로 말을 따른 것인지는 알 수는 없고, 당시 정치가들과 문화체육부 실무자들의 의견을 자세히 들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문제는 한국을 식민지배한 총독부의 건물로 세워졌다는 것 외에도 문제가 있었다. 경복궁 흥례문 권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어놓은 건물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고의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경복궁을 가리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원래 광화문과 근정문, 근정전은 일직선에 있어서, 왕이 근정전에 앉으면 육조거리가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는데 그 앞을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저 셋이 이루는 축에 맞지 않게 지어져서, 2006년 12월, 새로 복원하기 이전의 광화문은 각도가 약간 비뚤어져 있었다. 위치 또한 기존 조선총독부 정문 자리에 지어졌다. 그러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사실 이는 진북과 자북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지만, 일제의 악의였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한 가지 논란점이다.

개그맨 전유성은 "아깝다! 총독 집무실 자리에 화장실을 만들어서 전 국민이 시원하게 볼일을 볼 수 있도록 하면 좋았을 텐데!" 라고 신랄하게 이야기를 했다. 재활용 의견 중에는 전유성처럼 "화장실로 만들어서 재활용하자든지, 쓰레기 저장고로 쓰면 되겠네?" 처럼 일본을 비하하는 의견이 수두룩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총독부 청사를 일본으로 이전하여 복원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소문은 근거가 없다. 조선총독부를 한국 국내의 다른 곳으로 이전해 복원하자는 주장은 철거 수년 전부터 고고학계나 건축계에서 나오던 이야기였는데, 철거 두 달 전인 6월에도 성금을 모으느냐 마느냐 하는 얘기가 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당시 정부가 계산해 본 바로는 국내 복원 비용이 1400억 원에 달했는데, 일본 정부가 지불하기에는 너무나도 높은 비용이다. 한국 국내가 아닌 바다 건너 일본까지 수송한다면 더더욱 비쌌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도 근대 건축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도쿄 대공습으로 도쿄가 초토화 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몇몇 건축물도 상당수가 고도 성장기에 고층 빌딩을 세우기 위해 철거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근대 건축 보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관심을 조선총독부 건물에 그대로 투영했던 것이다. 실제로 도쿄의 마루노우치에 가보면, 근대 건축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파사드만 남겨놓고 상층부는 고층 빌딩을 올린 매우 어정쩡한 모습이 남아 있는 건물도 있다. 그 유명한 서울도서관으로 바뀐 옛 서울시청 청사 또한 이를 참고했다.







5.해체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에 현재의 용산구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임시로 쓰던 구 중앙청 후생관, 사회교육관 건물은 원안대로 국립고궁박물관이 되었다. 왕궁 박물관 건립에 291억 원, 신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에 3,300억 원 정도가 들어갔다. 다만 10년 간 나누어 집행하기 때문에 1년에 300억 정도 들어간 셈.

현재 철거지에는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경복궁 흥례문을 복원해 놓았고, 본격적인 철거 전에 행해진 첨탑 절단 행사 당시 잘린 첨탑과 일부 잔해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독립기념관 부지 내에 조선총독부 청사 이전을 위한 부지를 마련해 놓았는데, 그게 지금의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 공원이다. 하지만 이 장식물들의 전시 목적은 치욕의 역사를 보존해 다시 이런 과오를 반복 하지 않게 조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총독부 부재들이 어떠한 보호 설비나 장치도 없이 사실상 방치돼 있으니 비바람과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부식되고 있다. 심지어 낙서도 있다. 그 외에도 해당 장식물은 5m 반매장해서 모든 사람들이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었고, 부지 또한 해가 지는 방향인 서쪽에 배치해 일제의 몰락과 식민 지배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표시했다.

총독부 첨탑은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내부의 조경이 깔끔하기로 이름난 것을 감안하면, 이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 공원만큼은 정말 의도적으로 방치한다는 뜻.

이렇게 방치할거면 차라리 아예 없애버리지 저렇게 방치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영국령 홍콩 시절 총독부에 해당하는 관청이었던 머레이 하우스를 벽돌 하나하나 순서로 그대로 옮긴 사례처럼 독립기념관이라는 이름에 맞게 항일활동 전시관으로 활용할 수 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적 치욕인 삼전도의 굴욕의 상징물인 삼전도비가 현재까지도 비교적 말끔하게 보존되고 관리된다는 점을 논거로 들어 제대로 관리를 안 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삼전도비도 청일전쟁 이후 고종의 철거, 일제의 복구, 이승만 정부의 철거, 장면 내각의 복구 등 우여곡절이 있었고, 지역 주민들에게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또한 삼전도비가 국민 감정과는 별개로 청나라 초기의 만주어가 기록된 몇 안 되는 금석문이라서 언어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과 달리, 총독부 첨탑은 어떠한 문장이 새겨진 것도 아니라서 그 정도의 가치는 없다.

총독부 청사 철거 당시 현장 주변에서 조선총독부의 돌조각을 베를린 장벽처럼 기념품으로 판매하기도 하였다. 다만 조각, 중앙홀 대리석 등 보존 가치가 있는 일부 자재는 신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총독부에 사자상이 있었는데, 이 사자상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정문에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