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가 자유로운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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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가 자유로운 캐나다


2024. 4. 25.

 

안락사와 자살은 다르다. 이미 다양한 자살 방법이 있음에도 안락사가 요구되는 이유는 죽을 권리가 아닌 '덜 고통스럽게 죽을 권리'를 보장받기 위함이다. 암에 걸려 고통스러운 삶을 버티지 못한 탑건의 영화감독 토니 스콧은 결국 투신했다. 미 공군 조종사이자 변호사였던 도날드 코와트는 가스 폭발 사고로 눈과 손을 잃고 전신 화상의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화상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는 치료를 거부하고 안락사를 원했지만 의료계는 거부했고, 결국 끔찍한 고통을 대가로 71세까지 장수(2019년 사망)하게 된다. 그는 치료 이후 댁스 코와트로 개명하고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했음에도 죽는 날까지 환자의 권리(연명 치료 거부, 안락사) 운동가로 살았다. 댁스 코와트는 그의 다큐멘터리와 여러 강연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거나 투약 상태에서도 인간의 자율성이 동작할 수 있음을 알리는 일에 힘썼다. 극한의 고통에 처한 환자가 죽여달라는 것은 자율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안락사 반대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코와트는 환자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전통의 의료 윤리, 생명 윤리에 대해 재고하게 했다.

최선의 치료에도 삶의 질이 나아지지않는 시한부 환자의 경우, 연명치료로 고통받는 시간을 늘리기보다 가족과 이별의 시간을 가진 후 안락한 임종을 맞이하길 호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자신의 연명보다는 '질 높은 삶과 죽음'을 더 높은 가치로 여긴다. 6개월을 살더라도 연명치료없는 덜 고통스러운 삶이 12개월간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고통받다 죽는 삶보다 더 낫다고 평가하며, 질 높은 삶에는 질 높은 죽음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한다.

유족들도 연명치료를 힘들어한다. 연명치료로 더 고생만 하게 하고 보낸 것 같아서 죄책감과 후회가 든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도 하며 지켜보는 가족의 경제적, 정신적 부담이 크다. 국가 차원에서도 의료 재정에 부담이 되며, 유족들도 고된 간병 이후 우울증, PTSD 등의 정신병에 시달리거나 치매, 병을 앓는 환자를 죽이고 교도소에 수감되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에는 단순히 장수하는 것보다 건강 수명과 웰다잉이 중요시되고 있는 추세다. 비약적으로 증가한 기대 수명과 비례해서, 인간은 양적인 단순 수명 연장보다 질적으로 높은 삶과 그 삶의 안락한 죽음을 원한다는 것이다.

시한부 환자가 아니더라도 고통이 심한 중증 환자, 돌봄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신체적•정신적 중증 장애인, 극심한 우울증 환자, 거동이 불가능하여 콧줄을 사용하거나 와상생활을 하는 노인 등 삶의 질이 극도로 떨어진 사람의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는 안락사보다는 조력자살에 가까우며 윤리적 문제와 인구 절벽 문제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낮다.

사실상 경제적, 사회적 압박에 의한 타살이 될 것이라는 반론은 현재 어떤 나라들이 의사 조력 자살을 허용하고 있는지 보면 간단히 반박된다. 안락사 허용 요구가 높고 법적으로 허용된 나라들은 대부분 선진국이며, 지역적으로는 진보적 색채가 강한 곳이다. 캐나다 같은 경우는 전국민 건강보험에 병원비가 무료이기 때문에 경제적 압박도 없지만, 80%에 달하는 국민들이 의사 조력자살을 지지한다. 안락사에 대한 요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한 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지, 절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의사표현이 명확하지 않은 식물인간이나 치매 노인 등의 살해, 경제적 압박에 의한 가족의 타살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 등은 위에 설명되어 있는 의사 다수의 기대 수명 예측, 정신 감정, 제3자의 개입 등 제도적 장치로 배제 가능하다. 또 사후 장기 기증처럼 갑작스런 의식 불명 상황에 대비해 미리 의사를 밝혀둔 경우에만 허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안락사를 결정해야 하는 주체는 안락사를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부작용은 여타 모든 법제가 그렇듯 보완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미 안락사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엄격한 조건 하에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안락사를 허가해준다. 이때 이 환자의 고통은 경제적 부담, 차도가 보이지 않는 치료로 인한 희망고문, 그리고 환자와 가족의 정신 및 육체의 고통 등이다. 칼이나 자동차는 살인에 악용되는 사례가 매년 보고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유로 칼이나 자동차를 금지하지는 않는다. 안락사의 악용 소지만을 가지고 반대하는 것은 근거가 빈약하다. 호주는 모든 주에서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했으며 프랑스는 수개월 내에 안락사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반대 측에서는 비용 문제 등을 거론하며 안락사를 반대하지만,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저소득층의 질병을 치료해주는것도 아니니 허용하든 허용하지 않든 비용 문제가 생기는 건 똑같다. 조사에 따르면 임종 한달 전의 환자 치료비는 임종 2년 전에 비해 약 5~6배에 이르며, 암 환자의 경우엔 전체 진료비의 1/3이 임종 한달 전에 소비된다고 한다. 거기에 간병비까지 생각해보면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 임종 한 달 전에 들어가는 셈이다.

우선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안락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한 달에 병원비만 몇 백만원씩 나간다면, 그런 상태가 몇 년씩 이어진다면 재벌 아니고서야 파산하기 마련이다. 환자 본인도 링거로 연명하는 삶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다. 안락사 반대 측은 환자는 안락사를 반대를 하는데 가족들이나 의사들이 안락사를 강요한다는 일방적인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 안락사를 찬성하는 환자의 주장은 듣지도 않고 취사선택을 하는 것이다. 현실은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더 많으며 안락사 입법화 요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높아지고 있다.

또한 사람의 생각은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인 삶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청년층에서도 안락사에 찬성하고 있다는 점은 이들의 상황이 매우 좋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락사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안락사는 개인의 선택으로 결정해야 하며 정부와 종교단체가 개인의 결정권을 통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개인은 국가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 안락사는 허용할 수 없다는 것도 부당한 주장이다. 안락사는 환자가 죽고 싶지 않은데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안락사의 개념과 전제가 잘못되었다.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고통속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때 국가는 품위 있는 죽음을 보장해야 한다.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 종교의 경우 위의 서울신문의 통계자료에서 나왔듯이 아브라함 계열 종교 신자(천주교, 개신교)들도 절반 넘게 찬성하고 있어 통제를 해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측은 이러한 상황을 간과하며 안락사가 합법화 시 생산인구가 급감하여 국가존폐 위기에 이른다고 주장하지만 대안도 없이 반대하는 것은 결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안락사 도입의 주장이 나오는 것은 우울증, 정신병 환자, 장애인, 노인, 경제적 빈곤층에 대해 제도적 장치가 현실적으로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안락사는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안락사 반대 측에서 이야기하는 합법적인 살인은 그야말로 과장된 이야기로 이런 주장은 안락사 입법화의 시간을 더욱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안락사 찬성측은 현상유지가 아닌 실질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안락사 반대측이 생명존중을 이유로 안락사를 반대한다는 것을 미사여구로 늘어놓아도 안락사를 입법화하지 않고 현상유지를 하면 개인들의 고통은 해결되지 않는다. 안락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폭력인 셈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는다. 시간의 문제일뿐이다. 인간의 생명을 연명시키는 것은 좋은 일일수도 있지만 나쁜 일일수도 있다. 최소한 신체가 건강하고 경제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없을 때 오래 살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가난하고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중 일부는 오래 사는 것은 고통일 뿐이다. 안락사의 남용이 위험하다면 안락사가 살인으로 변질되기 않도록 제도를 보완하고 철저하게 검증하면 될 일이지 안락사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최소한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

안락사 반대 측은 인간이 태어난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미디어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안락사 찬성 측에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안락사 반대 측이 안락사를 반대하고 인간적인 위로를 해준다고 해도 안락사 찬성 측은 그것에 감동을 받지도 않으며 오히려 현실적인 고통에 더욱 스트레스가 쌓이게 된다. 그것은 안락사 반대 측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살아있는 게 죽음보다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안락사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안락사 반대 측이 막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