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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범행 전모를 알자 배심원단이 실신 할 정도의 극악했던 일본의 17세 소년범들 -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1988년 11월 25일부터 1989년 1월 5일까지 42일간 일본 도쿄도 아다치구에서 15~18세 사이의 남중생 및 남고생들이 주 2회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여고생을 납치해 각종 가혹행위, 폭행, 성폭행을 저지르고 살해한 뒤 공사장 인근 드럼통에 시신을 넣고 콘크리트에 묻어 은폐한 사건이다. 東京都足立区女子高生監禁リンチ殺人事件 (도쿄도 아다치구 여고생 감금 린치 살인사건), Murder of Junko Furuta(후루타 준코 살인사건)이라고도 불린다.

피해자 후루타 준코(古田順子, 1971년 1월 18일 ~ 1989년 1월 4일)는 당시 17세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으며 남동생과 오빠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었고 취직도 정해져 있었으나, 잔혹한 고문과 폭행, 강간 끝에 18세 생일을 불과 2주 앞두고 사망했다.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지도 34년이나 지났지만, 그 잔혹함과 끔찍함, 비인간성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지금까지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당시 청소년이었던 주모자들은 겨우 징역 5~10년을 받고 풀려났다. 이러한 범죄 사실에도 불구하고 저정도의 솜방망이 처벌이 나온 이유는, 일본은 살인범에 대한 처벌이 원칙적이고 꽤 엄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18세 미만 소년범에게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데다 피해 정도보다도 '피해자의 수'를 핵심 기준으로 처벌하기 때문에 저런 솜방망이 처벌이 나온 것이다.

1988년 11월 25일 오후 8시 30분경 사이타마현 미사토시, 주범 미야노 히로시(宮野裕史, 소년 A, 18세)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후루타 준코(17세)를 발견한다. A는 공범 미나토 신지(湊 伸治, 소년 C, 15세)에게 "내가 잘 해 볼 테니 저 여자를 발로 차."라고 지시했다. 무언가에 타격을 받은 준코는 무릎이 까지고 도로 옆의 도랑에 자전거와 함께 넘어진다. C는 준코를 발로 찬 뒤 도주했고, A가 나타나 "저 녀석은 유명한 변태다. 나도 저 녀석에게 칼로 협박당했다. 여긴 위험하니 데려다 주겠다."고 말을 걸어 대화를 하면서 천천히 준코의 집 쪽으로 걸어간다.

A는 준코의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어두운 창고 앞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난 야쿠자의 간부다. 야쿠자가 너를 사고로 위장해 차로 치어 죽이기로 되어 있다. 얼마 뒤 차도 이리로 오겠지만, 내게 몸을 바치면 용서해 준다."며 준코를 호텔로 데려가 강간했다. 그 후 "원래는 야쿠자가 너를 죽이기로 되어 있었지만, 넌 내 여자친구와 닮았으니 살려 주고 싶다. 너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윗선과 잘 얘기해 볼 테니 그때까지 여기에 있어라."고 말하며 준코를 안심시켰다.

그 직후 A는 납치 당일 자판기 앞에서 행인을 대상으로 퍽치기를 하던 동료 오구라 유즈루(小倉 譲, 소년 B, 17세)와 와타나베 야스시(渡邊恭史, 소년 D, 16세)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하나 잡아 두고 있다. 너희들 같이 먹어 버리지 않겠냐?"라고 불러내어 A-B-D의 순서로 4~5차례씩 돌아가며 윤간한 뒤 준코를 끌고 근처의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때 준코는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생전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다.

도중 차 안에서 A가 준코에게 "C가 너를 좋아한다. 사귀어라."고 명령했지만, 준코는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남자를 사귀기 곤란합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A는 "굴욕을 교육시켜 준다."라고 했다. 이후 A와 B가 술을 마시러 자리를 뜨고 C의 집 근처 공원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일행들은 실내로 들어가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C의 집이 사건 현장이 된 이유이다.


11월 27일, 준코의 부모는 경찰에 실종 신고했다.

납치 3일 후인 11월 28일, A는 지나가던 행인을 폭행하던 중이었다. A는 함께 어울리던 나카무라 테츠오(中村 哲夫, 소년 E, 16~17세)와 이하라 코이치(伊原 孝一, 소년 F, 15~16세)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겠다.'라고 불러내 밤 11시경 일행을 데리고 C의 집에서 자고 있던 준코의 앞에 나타난다. A는 겁을 줄 생각으로 감기약을 각성제인 것처럼 일행들과 나눠 먹으며 약에 취한 듯 행동하고 준코의 다리를 잡아 쓰러뜨렸다. F는 쿠션으로 준코의 얼굴을 눌렀으나, 준코는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C의 부모가 2번이나 현장에 찾아왔는데, 첫 번째엔 2층의 소음에 잠을 깬 C의 어머니 미나토 마스코토가 방의 상태를 봤으나 조명이 고장나 바닥의 스탠드만 켜져 있던 상태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2번째는 준코가 비명을 지를 때 아버지가 "방금 비명소리를 들었다. 너희들 뭐하는 거지?"라고 물으며 문 앞까지 찾아왔으나, C가 "신경 쓰지 마!"라고 쏘아붙이자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제대로 열받은 가해자 일행은 준코의 허벅지와 다리를 중심으로 폭행을 가하고 음부에 불을 붙이면서 윤간했다. 준코가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강제로 막기도 했다. 준코는 "도망치지 않을 테니 제발 그만 해 달라"고 애원했으나, 폭행과 윤간은 거의 2시간이나 계속됐다. 너무 격렬해서 준코는 걷기 힘들어 할 정도로. C의 부모가 만류함에도 소년들이 준코를 돌려보내지 않은 원인 중 하나이다.

준코가 감금 살해 당한 집

납치 후 5일이 지난 11월 30일, 준코의 부모가 경찰에 신고할까 봐 걱정한 A의 제안으로 가해자들은 준코에게 집에 "가출했으니 찾지 마. 친구 집에 있으니 실종 신고는 취소해 줘."란 전화를 먼 지역의 공중전화로 걸도록 강요한다. 5일에 걸쳐 3번 걸게 시키며 "경찰서도 멀고, 저 차는 야쿠자의 차이다. 도주하려고 하면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협박했고, 전화를 할 때도 옆에서 감시했다. 그리고 그날 C의 어머니와 인사한 준코는 자신을 "사이타마현의 고교생"이라 소개했고, C의 어머니는 준코에게 "늦었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준코는 소년들과 2층으로 올라갔고 C는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낸다."라고 말하면서 따라 올라갔다.

5일 뒤인 12월 5일, C의 방을 청소하다가 쓰레기통에서 생리대를 발견한 어머니는 2층으로 찾아가 감시 담당인 소년 D와 함께 있던 준코에게 "왜 집에 돌아가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준코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준코를 가출소녀라고 생각하고 이름을 물었지만, 준코는 "사이타마현에 사는 고교 3학년 학생이고, 취직이 결정됐다"는 대답밖에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테니 어서 돌아가라"고 말했다. 같이 있던 D도 "그래,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해, 식사를 시킨 뒤 준코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분위기가 됐다.

식사 도중 C와 아버지가 돌아와 C에게 "여자친구인가? 나에게도 소개해 주렴."이라고 말을 걸었으나 묵살당하고, 준코는 다시 소년들에게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가게 됐다. C의 가족들도 낯선 소녀가 들락날락하는 걸 보고 신경이 곤두서 다음 날에 다시 찾아와 "이 집엔 남자가 2명이나 있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거지?", "여긴 그 야쿠자 같은 것들[11]도 있으니 얼른 돌아가렴."이라고 말을 걸었으나, 준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른 돌아가자"며 준코의 가방과 소지품을 들고 내려왔지만, 준코는 가해자들이 두려워 2층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준코의 가방에서 나온 집 전화번호를 확인한 뒤, 아들에게 구타당할 것을 염려해 시부모의 집으로 찾아가 준코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C의 어머니가 "댁에 후루타 준코라는 딸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준코의 어머니는 "지금은 준코가 집에 없습니다. 누구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소년 C의 어머니는 주저하다가 가짜 이름을 대고 끊어 버렸다. 준코의 부모는 가짜 이름을 토대로 수사했기에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다시 자택으로 돌아온 C의 어머니는,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준코와 이야기하는 걸 목격한다.

신지의 부모는 한 달에 한 번, 혹은 1년에 몇 번이었다고 하지만 아들들이 자기가 해야 할 최소한의 집안일조차 안 하면 어머니는 술에 만취해 퇴근한 아버지에게 이를 알렸고 아버지는 아들들을 깨워 때렸다고 한다. 도망치면 쫓아오면서 뒤통수를 때렸고 집 근처 공터에서 상의를 벗게 하고 달리게 한 적도 있었지만, 이런 사정이 있었어도 절대 신지의 여러 범죄가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런 학대가 신지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게, 신지가 성장해 중학생이 되면서 체력이 강해지고 공격적이게 되면서 아버지의 폭력은 완전히 멈췄고, 아버지의 가정폭력이 멈추는 시점부터 신지의 가정폭력이 시작됐다고.

소년들은 주범들이 나간 사이에 C의 아버지가 들어와 준코를 희롱하거나 겁탈한 적이 많다고 증언했다. C의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부정했고 증거불충분으로 인해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현관문으로 나서는 준코의 앞엔 C의 형(湊恒治, 미나토 코우지, 1972년 1월 21일생으로 당시 16세, 현재 51세)과 B가 대기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준코를 근처의 공원으로 데려가 귀가시킬지 말지 상의했다. 준코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제발 집에 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녀를 다시 집에 가두기로 결정한 그들은 C의 부모에게 들키지 않도록 이들이 자는 틈을 타 준코에게 건물 옆 전봇대를 타고 창문을 통해 C의 방으로 올라가도록 시킨다. 당시 준코의 상태가 심각하진 않았지만, 폭행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 집으로 돌아온 C는 어머니가 준코의 집에 전화한 사실을 알게 되곤, 몇 시간에 걸쳐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이 시점에서 C의 부모는 준코가 집에 돌아갔다고 생각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년들은 준코를 풀어 줄 생각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

이때까진 준코의 돈으로 옷을 사서 갈아입히거나 음식을 먹이고 생필품을 사주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러나 감금이 지속되며 준코가 하루 18시간 이상 폭행 및 성적 고문을 당해 상처가 심해지면서, 그런 것마저도 사라진다. 납치 약 한 달째인 12월 하순까진 컵라면, 빵, 우유, 계란 등을 C의 형이 먹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쇠약해져 고작 하루에 우유 1잔만을 먹을 수 있었다. 옆방에 있던 C의 형은 이후에도 소년들이 없을 때 한 번씩 준코를 도와주긴 했지만, 상술한 것처럼 동생 일행의 폭력에 잡혀 사는지라 사건이 드러날 때까지 두려움이 있었는지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다.

C의 어머니는 준코가 소년들과 식후 TV를 보거나 같이 패밀리 컴퓨터 대전 격투 게임도 해서, 서로 사이가 좋은 줄 알고 있었다. "준코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에, C의 불량한 친구 중 하나로 생각했다"고 증언했으나, 담배는 불량배들의 강요로 피운 것이었다. 초반엔 준코가 가해자들의 지시에 잘 따랐고, 11월 말까진 폭행 및 가혹행위의 강도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라서 잘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준코가 방 밖으로 나갈 땐 반드시 가해자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다음 날 12월 7일, 준코는 가해자 소년들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몰래 1층에 내려와 신고하지만, 인기척을 느낀 A에게 들킨다. 강제로 전화가 끊기자 경찰은 역추적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소년들은 "장난전화였다"고 무마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A는 고함을 지르며 자고 있던 다른 소년들을 깨워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냐"고 물컵을 집어 던지는 등 광분하여 호통쳤다. 신고한 것도 화나는데 A에게 혼나기까지 해서 B, C, D도 격분한다. 준코는 소년들에게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것이 준코가 방 밖에서 한 마지막 행동이 됐다. 이때부터 준코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소년들에 의해 아래에 서술된 가혹행위들이 시작된다.

특히 가해자 B는, 이때부터 누구보다도 집요하고 혹독하게 준코를 구타하고 고문했다.



1989년 1월 4일, 미야노 히로시는 마작에 크게 실패해 10만 엔에 달하는 빚을 지고 D의 집에서 일행과 합류한다. 12월 20일경부터 준코의 상태가 극히 심각해져서 그들은 준코를 처리하기 귀찮은 물건으로 여겨 한동안 찾지 않고 C의 집에 방치해 두고 있었다.

A는 "마작에서 진 것도 다 준코 때문이야"라며, "오랜만에 준코를 괴롭히러 가자"고 제안했다. 이에 다같이 C의 집으로 가 준코를 폭행한다. 이때가 오전 8시. 탈진한 준코를 세우고 얼굴에 촛농을 떨어뜨리거나 소변을 먹였고, 양 옆에서 1명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른 1명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머리, 어깨 등을 번갈아가며 구타했다. 이때 D는 "딱히 관심 있지는 않았으나, A와 B가 두려워 폭행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 준코가 자력으로 일어서려다가 넘어져 카세트 플레이어에 머리를 부딪혀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고 A는 준코의 죽음을 예감했지만, 꾀병이랍시고 더 심하게 폭행을 계속하고 B 역시 6kg의 아령을 하복부에 떨어뜨렸다. 준코의 반응이 없자, 불로 피부를 지져보았다. 준코는 처음엔 움찔했지만, 미동도 없어졌고 소년들은 "죽은 것 아닌가?"란 두려움에 휩싸였으나 곧 "원래 이렇다"는 C의 말을 듣고 안심한 뒤, 테이프로 준코의 발목을 묶어 방에 방치하고 오전 10시가 되자 막 개장한 사우나로 갔다. 준코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감시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전원 외출한 것. 이후 당일을 넘기지 못하고 준코는 사망했다.

하루 외박을 한 소년들은 C의 형에게 "준코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연락을 받는다. 준코가 감금당한 방은 안에서만 열 수 있기에 바로 옆에 있는 C의 형의 방 베란다에서 상태를 지켜보니 준코가 이불 위에 쓰러져 있었다. 소년들은 "준코가 죽은 것 같다"며 들어가길 꺼렸다. 그들이 들어갔을 때, 준코의 몸은 이미 차가운 상태였다. 안타깝게도 준코의 기일(1월 4일)은 그녀의 생일(1월 18일) 14일 전이었다. 또한 준코가 납치(11월 25일)된 지 3일 후(11월 28일)가 준코의 어머니의 생일이라, 전부터 어머니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A는 준코의 시신을 이불로 싸맨 뒤 여행 가방에 넣어, 테이프로 말아 주범이 일했던 타일 공장 근처에서 가져온 드럼통에 넣어 콘크리트를 넣고 벽돌 등으로 고정했다. 굳이 콘크리트를 넣은 까닭은 공구리 괴담을 믿은 걸로 추정된다. 다큐에 따르면 만화에서 힌트를 얻었다고도 한다. 이때 백주대낮에 당당히 준코를 콘크리트에 매장한 장소는 놀랍게도 아다치구의 주택가가 밀집한 A의 집 앞 주차장이었고 들키지 않기 위해선지 빌린 차에 드럼통을 실어 옮겼다고 한다.

드럼통을 숨기기 위해 이를 검은 쓰레기 봉투에 넣은 뒤 테이프로 밀봉했다. 그 뒤 A가 빌려온 왜건 차량을 운전해 드럼통을 아야세 강 근처에 버리려 했으나, B가 "집 근처라 귀신이 되어 나올 거 같다"며 무서워했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인 도쿄만에 버리려 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 14호지 해변 공원 정비 현장의 공터에 버렸다. 만약 바다에 버렸다면 미제 사건이 됐을지도 모른다.

A는 드라마 <톤보>의 마지막 회를 녹화한 비디오를 찾았다. 준코가 납치된 날, 준코는 그것의 마지막 회를 보기 위해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귀가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대해서 준코가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같이 넣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비디오를 꽃다발과 함께 넣으려고 했지만, "범인을 특정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B의 만류로 그만둔다. 자기들이 살해해놓고 무슨 헛짓거리인가 싶지만, 사람이 죽어 슬퍼서 한 일이 아니라 A는 "준코가 불쌍하다기보다는, 저주받기 싫어서."란 충격적인 이유를 밝혔다.



이 천인공노할 사건은 가해자들의 시체 유기로 영영 묻히는 듯 했으나, 사건 발생 3개월 뒤인 1989년 3월 29일, 뜻밖의 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소년 A는 1988년 11월 8일에 있었던 또 다른 19세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치상 및 절도 등의 혐의로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아야세 경찰서 수사관의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담당 형사가 "너 사람을 죽이면 안 되잖아?"라는 질문을 하였다. 이때 A는 부하들이 이미 사건에 대해 자백했다고 착각한 나머지 사건의 전모를 몽땅 불어버렸는데, A가 모든 걸 털어놓게 만든 질문은 사실 형사의 단순한 말실수였다. 만약 말실수가 없었다면 이 사건은 실마리를 풀지 못한 채 영원히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로 인해 A는 담당 형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불기 시작했고 이런 터무니 없는 소리에, 경찰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현장에 다급히 출동해 범인들이 자백한 공터에서 콘크리트 범벅이 된 드럼통 하나를 발견했다. 드럼통의 틈새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해서 즉시 크레인을 동원해 경찰서로 이동시켰다. 원래 드럼통 하나의 무게만 해도 굉장히 무거운데, 여기에 40kg에 달하는 준코의 시체, 이불, 가방, 그리고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까지 더해져서 전체 무게는 305kg에 달했다.

다음날 오후, 경찰서에서 해체 작업이 시작됐고, 곧 보스턴백에 담겨져 두 이불에 싸인 여성의 시체가 발견됐다. 이미 사후 수 개월이 지났고 당시 온전한 상태로 유기된 것도 아니라, 부패가 매우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였다. 당연히 경찰들은 A가 밝힌 사건의 전모가 사실임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공판 당시 재판소는 찬 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였으며 배심원단이 실신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너무 충격적이다 보니, 한국에서도 사건 직후 심해지는 일본의 소년 범죄에 관한 기사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미국, 유럽 등의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했다.



도쿄고등법원에 이르러 "피고인들이 반성하고 이후의 소년범으로서 교정 등의 갱생 필요성을 감안해도 유족이 엄벌주의로 처벌하기를 탄원하고 있고 해당 사건의 죄책이 사회적 통념에 비춰보아 매우 흉악하고 중하다"면서 1심에서의 양형이 가중돼, 소년 A 징역 20년, 소년 B 장기 10년 단기 5년, 소년 C 장기 9년 단기 5년, 소년 D 장기 7년 단기 5년이 확정됐지만 유일하게 상고해 1심으로 확정됐다.

재판 기록에 의하면 실제론 이들 이외에도 가담한 100여 명의 가해자가 더 있지만 그들은 직접적으로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 대부분 약식절차로 처분돼 가볍게 처벌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동생의 범행을 방관, 방치했다고 볼 수 있는 C의 형도 피고인 4인의 공범으로 살인 및 사체유기와 강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지만 소년보호처분을 받는 것으로 끝. 이들은 일본에서 소년법이 없었다면 사형이 나왔을 자들이다.

당시 기록엔 법정에서도 그들은 "준코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죽는다는 생각조차 할 여지가 없었다."고 적혀져 있었다. A는 "준코는 단지 운이 없어서 바보 같이 잡혔던 것뿐이다."라고 말하고, 반성조차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가면서 자신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적반하장으로 "억울한 사람을 이렇게 끌어들이고 부끄럽지도 않냐"고 하고는 욕설까지 퍼부었다. 게다가 그는 눈물을 흘리긴 했으나 그것은 피해자에게 저지른 짓에 대한 반성의 눈물이 아닌 "병신 같이 잡혀버린 내 자신이 불쌍해서" 흘린 눈물이었다고 한다.

분노한 준코의 부모는 피고인 측의 면회 신청 및 성묘를 금지했고 그 비통한 심정을 재판소에 토로했다. 준코의 아버지는 재판 증언 당시 "피고인에 대한 원 판결의 과형은 너무 가볍다"고 했다. 그나마 형량을 제일 많이 받은 A도 준코의 부모 입장에선 죽일 놈인데 나머지도 미성년자라 해도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다만 소년법의 적용뿐만 아니라 사형 판결을 내리는 일본 사법부의 관행에 비춰봤을 때, 판사들이 사형 판결까지 나올 성질이 아니라 판단했다는 말도 있긴 하다. 다수를 살해하거나 유괴살인 혹은 살인 전과가 있는 상황에서의 추가적인 살인은 사형 선고가 원칙이지만 그 외의 살인에 대해선 가급적이면 사형 선고를 회피하거나 주범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본 사법부의 관행이었기에 20년 이상 선고가 불가능한 소년법의 적용과 더불어 A에게만 엄한 판결이 나온 것이란 분석이다. 현재도 별 차이는 없어서 간혹 나오는 사형 집행 기사를 보면 사형수 대부분이 사람을 두 명 이상 죽이거나 살인 재범, 유괴살인 등을 저지른 범죄자다.

현재 A를 포함한 가해자 4명은 출소했지만 대부분 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있으며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다고도 한다. 게다가 34년이 지나 현재까지도 인간 말종급 강력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로 재수감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