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제는 어렸을 적 고생한 영향으로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끔찍이도 싫어했기에 재위 기간 동안 관료들의 기강을 철저하게 단속하였다. 그리고 오랜 혼란으로 황폐화된 토지 개간을 장려하여 농업 생산력을 끌어올리며 사회를 안정시켰다. 훗날 청나라 강희제가 강남을 순행하면서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에 참배한 후 홍무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치세가 중국 역사에서 번영의 상징으로 꼽히는 당나라, 송나라 시절보다 융성했다는 의미의 치륭당송(治隆唐宋)이라는 네 글자를 친필로 써 비석을 세웠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명 태조 주원장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황제다. 서민 신분의 사람이 통일 왕조의 황제가 된 것은 전한의 유방에 이어서 두 번째였다. 그는 가장 밑바닥 계층 출신으로 시작하여 천하의 대권을 잡은 황제로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고, 이 사실만으로 주원장은 민중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출신 성분과 이후의 치적 덕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성군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신하들 사이에서는 폭군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는 개국공신들을 쥐 잡듯이 잡아 족쳤기 때문이다. 개국 3대 공신 중 유기, 이선장 등도 비참한 말로를 겪었으며 살아남은 공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족쳤다. 게다가 신하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노발대발하면서 두들겨 패는 일이 잦아서 더더욱 심했다.
특히 왕권 강화를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공신들이 숙청의 칼날에 희생되었다. 숙청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명나라 건국 이후 죽어나간 공신과 그 가족들의 수는 수만 명에 이를 정도. 주로 초창기에는 공신들 중에서도 무장들이 많이 숙청되었으며, 말기로 가면서 행정 체제가 점점 안정 궤도에 접어들자 권신들까지 싸그리 제거해버렸다.
또한 엄청난 일 중독자로 유명했다. 명군이나 명재상으로 이름난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부지런했다는 것. 1380년 좌승상 호유용을 숙청하고 승상직을 폐지했는데 이것은 황제가 승상의 일을 대신했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승상직을 폐지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엄청난 양의 업무를 일일이 소화하는 강행군을 이어나갔다. 그 아들이나 손자부터는 그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보조하는 신하를 두었다. 그런데도 주원장은 죽을 때까지 승상을 두지 않고 본인이 직접 정무를 돌보았다.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얼마나 업무를 처리하는지 계산을 해봤는데 8일 동안 문서 3,391건을 처리했다고 한다. 대략 하루에 처리한 것이 400건이 넘는 것이다. 어떤 일화에서는 어떤 상소문이 자신에게 올라왔는데 문제는 사건을 건의하고 해결책에 대해 청원하는 부분은 500여 글자 밖에 안되는 것 비해 자기를 찬양하는 구절만 1만 글자가 넘어간 상소문이었다. 그래서 안그래도 바빠죽겠는데 상소문을 읽던 신하가 자신을 찬양한 글을 6천 글자 쯤까지 읽자, 결국 찬양 구절을 읽느라고 시간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그 신하를 조정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폭행했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조부 진소양왕에게 물러받은 기반이 있었고, 한고제는 본인의 지분이 크긴 해도 한삼걸이라도 있었으나, 주원장은 실질적으로 맨바닥에서 일어나 천하통일 과정에서 본인이 유방, 한신, 장량, 소하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서달, 유기, 이선장이 명나라 3대 개국공신으로 꼽히긴 하지만 막상 전공을 검토하면 서달 말고 나머지 둘은 확실히 쳐진다. 저들의 공이 적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주원장 본인의 존재감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천하통일을 마치고 제위에 오른 뒤에도 승상직을 폐지하고, 많은 신하들을 숙청하고, 온갖 입법, 행정 업무를 다 처리했다. 홍무제의 아들 영락제를 비롯한 후대 황제들은 주원장의 업무 처리 능력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고 내각대학사 등의 재상에게 일부 업무를 위임할 정도였다.
주원장이 천하통일에 나설 때부터 모든 정책은 주원장이 큰 그림을 그리고 모사들이 세부 계획 채우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보통 고전 군담물을 보면 책사들이 대전략을 제시하고 주군이 그 헌책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묘사되는데 주원장은 혼자 초인 노릇하고 있던 것이다. 이선장이 헌책을 올려도 '내가 볼땐 영 별론데?' 라며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해서 성공한 적도 여러 번이다.
심지어 기반 세력도 장인이었던 곽자흥의 것을 날먹하긴커녕, 오히려 몇백 명 있던 병사까지 장인 곽자흥한테 줘버리고 25명의 최측근만 데리고 의병을 모아 새로 다진 것이다. 25명으로 시작한 병력이 3천 명 ~ 4천 명으로 늘어나고, 목대형을 굴복시킨 덕분에 2만 명까지 불어난 군대를 군율 강조하면서 재조직한 것을 보면 흔하디 흔한 창업군주의 건국 신화와 궤가 다르다.
게다가 남경 함락이나 파양호 대전까지 가면 그야말로 괴수가 따로 없다. 이후 나머지 군벌들과 몽골 잔당을 처리할 때는 친정을 나서지 않고 장수들을 보내는데, 주원장이 서류 하나하나 살피면서 보급과 작계를 맡으며 본인이 장량과 소하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그리고 홍무제는 당대의 군벌치고는 배신을 거의 당하지 않은 편인데, 이건 주원장이 직접 양자를 여럿 들여서 장수들 감군 노릇하게 시키고, 장수들 일가 친척을 모두 불러모아 인질로 잡고, 장수들은 철저히 자기가 짠 작계대로 움직이게 했기 때문이다. 조금만이라도 이상한 짓한다 싶으면 바로 가족 몰살의 시그널을 보내며 철저하게 명나라 군정 모두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 이런 수준이니 주원장은 서달 말곤 다른 애들은 눈에 차지도 않았을것이다.
즉, 극도로 유능한 천재이자 독재자인 주원장의 시선에서 신하란 존재들은 도구에 불과하고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홍무제가 만든 제도는 홍무제 본인 같이 유능한 황제가 국가의 모든 사무를 직접 결정하는 것으로 황제의 측근에 업무를 보조할 인원이 방대하게 존재하여야 했다. 홍무제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어서 전각대학사 제도를 신설하여 황제를 보위하게 했고, 뒤를 이은 영락제는 아예 내각을 만들어 학사들의 보다 적극적인 정책 참여를 장려했다.
그런데 황궁은 야간에 일정시간이 지나면 남성들이 남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였으나, 황제의 업무는 밤낮이 따로 없어야 했기에 황제의 심부름꾼들인 환관들의 발호는 피할 수 없는 것이였다. 당장에 홍무제 시기에는 고위직을 독점한 공신들을 제거하고 홍무제 본인이 유능했으니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뒷시대가 되면 군신공치를 기본원리로 깔고 있는 성리학을 배운 관료층과 황제 친위세력간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명청교체기 당시 명나라가 청나라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부분은 동림당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세력과 환관으로 대표되는 엄당 세력의 갈등이 영향을 미친게 적지 않다. 또한 역사적으로 황제권 강화는 환관이나 외척의 발호를 불러왔다는 것을 생각하고, 더하여서 홍무제도 공신 및 관료층들에 대한 견제로 금의위를 창설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황제의 독재체제가 붕괴하던, 환관 및 외척들이 발호하던, 후손들 가운데 홍무제 본인급의 황제가 나오지 않는 이상에야 추후 발생할 문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였다. 그리고 후대의 명나라 황제들 중에 유능한 황제들은 있었어도 능력이 홍무제에 버금가는 황제는 당연히 나온 바 없다.
어쨌거나 홍무제가 만든 이런 황제의 제도와 위상이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명청시대 중화권 황제들에게 일종의 모범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21세기가 된 오늘날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한자문화권 황제들이나 군주들의 모습은 사실상 주원장이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때문에 명청시대 이전 동아시아 황제, 군주들도 이 시기와 비슷하다 생각하고 사극을 보다가 혼란해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주원장이 다른 통일군주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바로 통일 이후의 내정 정책에 있다. 홍무제는 통일 이후에도 정력적으로 각종 사업을 추진했으며, 특히 사민 정책에 큰 공을 기울였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을 거치며 화북은 북송 시기와 비교해 인구가 사분의 일 수준만 남을 정도로 쇠퇴한 상태였다. 특히 원나라 말기의 난세는 전란 뿐만 아니라 홍수와 태풍 등의 자연재해까지 겹치며 인세에 지옥이 도래한 수준이었다.
오죽했으면 명나라 홍무13년(1381년)에 전국 총인구는 5987만3305명인데, 산서성 인구는 410만3450명이었을 정도였다. 산서가 유력 군벌이었던 코케테무르의 근거지라 그나마 안전한 곳이었고, 중원과 하북의 다른 지역은 황하 범람으로 헬게이트가 열렸기 때문이다.
원말명초는 그야말로 아포칼립스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이어지는 격동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무제는 통일을 했다고 안주하지 않았다.
화북의 다른 지역들을 살리기 위해 홍무제는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다 싶을 정도의 사민정책을 시행한다. 여기에는 휴경지 개간시 세금 면제, 정착비용 제공, 소와 농기구 그리고 볍씨 무료 불하, 대규모 공공사업 시행 등의 세부적인 정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 1393년 경작지는 8,804,623면, 1395년까지 전국에 총 40,987개의 연못과 보가 건설, 약 4,162개의 하천이 준설 되었다. 이 수치는 명나라를 통틀어 최고점으로, 홍무 치세 이래로 다시는 달성된 바가 없다.
일례로 산동성 금향현에는 1,247개의 마을이 있는데, 원나라 이전에 69개 마을, 명나라 때 830개 마을, 청나라 때 323개 마을, 민국 이후에 8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버드 중국사에 따르면, 주원장이 황제에 오른 후 재해가 뚝 끊겼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단순히 자연의 변화무쌍함 덕분이라기보단 주원장이 시행한 인프라 재건의 덕도 톡톡히 보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태조가 수백 년 동안 이어질 국가의 근간을 자기가 직접 마련한 셈이다. 주원장의 내정 정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393년,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이란 이름으로 인구조사와 토지조사를 마쳐 더욱 박차를 가한다. 다른 왕조들은 2대, 3대에 걸쳐 해냈던 일을 주원장은 혼자서 다 끝마쳤던 것.
즉, 이때까지 건국초의 명나라라고 하면 '철혈 군주와 강성한 대제국'이란 막연한 이미지만을 연상했지만 사실 홍무제의 명나라는 잿더미에서 가까스로 부활한, 초인의 구상대로 재건된 문명이었던 셈이다.
훗날 청나라의 강희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홍무제의 업적을 칭송했다.
숙청
주원장의 커리어 중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행적이라면 숙청을 단연 빼놓을 수 없다. 주원장의 숙청은 그 규모와 잔혹성에 있어서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는데 그나마 주원장의 숙청에 그나마 비견될 수 있는 사례로는 10족을 멸한 것으로 유명한 자신의 아들 영락제의 대숙청이다. 주원장은 자신을 도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공신들과 그 일족을 모조리 죽였는데, 숙청이 대상이 된 사람들과 학연 등 인맥이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기 때문에 주원장의 숙청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은 9만 또는 10만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숙청이 비록 구세력을 구축하며 들어선 신생 국가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변론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주원장의 숙청은 필요 이상으로 너무나 대규모였던 데다가 너무나 잔혹했다. 참고로 송나라의 경우만 봐도 비교적 온건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주원장의 숙청은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지만 그 방법 또한 너무나 잔인했다. 주원장은 어지러워진 치안과 사법 체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 굉장히 잔인한 고대의 형벌로 범죄를 다스렸다. 특히 반역죄로 처형했을 때에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 사람의 살을 포 뜨듯 떠내서 죽이는 능지형은 물론이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에게는 특별히 박피형을 내렸다.
여기서 박피형이란 말 그대로 그대로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이다. 주원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벗긴 가죽을 허수아비 위에 둘러씌워 관청 문 앞에 세워놓게 했다. 심지어 그는 직접 형벌을 고안해내기도 했는데, 돼지 털을 벗기는 것에서 착안하여 소세(梳洗)라는 형벌을 만들었다, 빗으로 씻긴다는 뜻인데, 그 방법이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했다. 벌거벗은 죄수의 몸에 펄펄 끓는 물을 여러 번 뿌린 뒤, 철로 만든 빗으로 쓸어서 피부를 벗겨내는 형벌이다. 이는 피부만 벗기는 것이 아니라 뼈가 드러날 때까지 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무릎 연골을 빼내는 알슬개(揠膝蓋), 내장을 꺼내서 죽이는 추장(抽腸)을 비롯하여, 전갈과 뱀을 풀어서 물려 죽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형벌이 바로 장형(杖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그러나 그는 이러한 끔찍한 형벌들을 즐겼는지, 아니면 죄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는지, 이러한 형벌들을 집행하는데 직접 나와서 자신이 이러한 형벌들을 주도했다.
특히 형벌을 가할 때에도 천천히 매우 고통스럽게 죽이게 했다. 능지처참을 할 때에도 칼로 살살 피부를 그어가다가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고 죽게 하였으며, 박피형을 행할 때에도 살을 천천히 벗겨서 죽기 직전까지만 살을 벗긴 다음에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만약 중간에 형벌을 당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형을 집행했던 망나니가 박피로 처형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망나니 또한 죽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고통스럽게 죽였다고 한다. 문제는 범죄를 다스리기 위한 엄벌주의와 별개로 순수하게 정치적인 숙청에까지 이런 혹형들을 폭넓게 활용해서 셀 수 없이 많은 공신들과 신하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가게끔 하였다는 것이다.
마 황후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이성적인 브레이크를 걸어가면서 숙청을 진행했던 거 같지만, 마 황후가 세상을 뜨자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공포와 폭압,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같다. 이러한 온갖 잔혹한 형벌들은 조정을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게 했고 신하들은 모두 황제를 무서워했다. 아침에 신하들이 등청하여 주원장을 배알할 때, 만약 옥대(玉帶)가 배꼽 위에 있으면 오늘은 사람을 죽이지 않거나 적게 죽이겠다는 뜻이어서 신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만약 그가 옥대를 배꼽 아래로 누르고 있으면 그날은 사람을 대량으로 참혹하게 죽이겠다는 신호였으므로, 문무백관들이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대인들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두려우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樂鄕)하거나 은거(隱居)하면 되지 않나 하겠지만, 주원장은 그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주원장이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들 중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은 오직 황제를 위하여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 명령을 어긴 신하, 한마디로 일을 고의로 대충 하거나 일을 그만두는 관리가 나오게 되면,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집안까지도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관직을 함부로 그만둘 수도 없었다.
특히, 호유용 옥사의 잔재를 핑계삼아 일어난 남옥의 옥사 때 남옥을 포함한 호서파가 1만 5천명이 넘게 죽어나가서, 황태손 주윤문(후대의 건문제)이 제발 사람 좀 죽이지 말아달라고 직접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원장은 "황위는 가시나무 몽둥이 같은 것이니, 자기 생전에 가시들을 다 제거해주려고 이런 짓을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른 버전으로 황태손에게 가시 막대기를 들어보라고 했는데 들지 못하자, "내가 그 가시들을 전부 없애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또 명산장이라는 사료에서는 주표가 이에 대하여 "위에 요순같은 임금이 있으면 아래에 요순의 백성이 있는 법"이라고 반박하자 주원장은 화가 나서 주표에게 의자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아서 주표를 쫓아가며 때리려고 할 때 마침 주표가 그림 한 장을 떨구었는데 그 그림의 내용이 옛날에 마황후가 전장에서 홍무제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이라 마황후 생각이 나서 멈췄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좌승상 호유용을 비롯한 권신과 그 일가족 3만여 명이 처형당한 사건인데, 이를 계기로 승상직을 폐지하고 중서성을 황제의 직속으로 두는 황제 친정 체제를 구축하였다.
주원장은 관료들을 황제의 통치를 위한 것, 철저히 왕권에 필요한 소모품 정도로 봤다. 말 안 듣는 물건은 부셔버리고 새 거 사서 쓰면 되니, 아끼고 소중히 한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 그래서 사대부나 권신들이 크게 반발하였지만, 반발했던 권신들은 죄다 찍어 눌렀고,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권신들도 죄다 죽어나갔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냥 황제의 지시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이와 같은 주원장의 과격한 숙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세 동안 명나라는 끊임없이 성장했다. 1393년 남옥의 옥으로 공신들을 숙청하는 와중에도 홍무제는 인구조사와 토지조사를 기어이 끝마쳤으며, 대규모 사민 정책을 시행하여 화북과 중원 지방을 부흥해내는데 성공한다. 실제로 홍무제 시기 명나라의 경작지는 8,804,623면에 달하는데, 이후 정난의 변이 터지며 다시는 저 수치를 회복하지 못한다.
또한 주원장은 원말에 잦았던 재해의 극복을 위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시행했다. 그의 명령으로 총 40,987개의 연못과 보가 건설, 약 4,162개의 하천이 준설 되었는데, 덕분에 홍무제의 치세 동안 원말과 같은 황하와 장강의 범람과 극심한 가뭄은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규모 숙청을 하면서도 전혀 행정의 공백이 생기지 않은 것.
이렇듯 주원장은 어떤 통일군주보다 적극적인 내정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를 위해 중요 관료가 아닌 실무자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았다.숙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황권 확보였기에, 왕권을 침범할 가능성이 없거나 그럴 야망이나 능력 자체가 없는 자들은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아 최소한의 신뢰성은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숙청으로 수많은 개국공신들이 죽었는데, 숙청 이전에 전사하거나 병사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탕화, 목영, 경병문, 곽영, 장룡, 고성만이 숙청을 피했다.
이들 중에 경병문, 곽영, 고성은 정난의 변에도 관련된 인물이다. 여기에 너무 만연하게 늘어지던 문장을 일소하고 실용적이며 간소한 문장을 지향한다면서 관리들을 후려쳤는데, 이 과정에서 관리들을 처벌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자의 옥마냥 여러 꼬투리를 잡아 죽이거나 탄압하고 연관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희생시킨 점은 비난받는다. 문자의 옥만이 아니라 유학 경전을 탄압해서 절대 왕권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했다.
지나친 숙청으로 명대부터 강대한 황제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신권(臣權)의 위력이 송대에 비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이는 암군과 환관들의 발호 등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환관이 날뛰는 것은 아들 영락제의 중용 때문이었고, 홍무제는 환관들을 확실히 찍어누르며 관직 임용에 제한을 가했다. 또한 후대에는 자신과 같은 가혹한 형벌을 관리들에게 가하지 않게끔 조치하기도 하였다. 명 초기의 고문과 형벌은 전대의 왕조들보다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홍무제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왕조 초기에는 법이 엄해야 한다는 원칙과 더불어 기존 공신 집단 숙청 등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기에 국가 반역자나 연쇄 살인범과 같은 중범죄자가 아닌 이상 혹형을 집행하지 않았으며 초기를 제외하면 명대의 형벌이 지나치게 잔혹했다는 근거는 없다.
명 왕조에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형벌은 태장도유사의 5형이었지만, 홍무제는 자주 임의적인 형벌을 가하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능지처사(陵遲處死)가 있다. 이러한 정식 형벌(5형)과 임의처벌(능지처사)이 공존하는 형태는 명대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한당송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5형과 요금원으로 이어지는 이민족 왕조의 유산이 결합된 결과다.
숙청의 이유
위의 내용만 보면 그냥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인 미치광이 살인마로 보이나, 당시 시대적 상황상 숙청은 다음의 이유로 인해 필요악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명나라는 중국 역사상 한족 왕조나 한화된 이민족 왕조를 전조로 두지 않은 유일한 통일 한족 왕조였다. 이는 다른 신생 왕조들과 달리 이민족의 방만한 통치로 쇠락한 황실과 조정의 권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원나라의 행정력이 워낙 엉망이었던 탓에 명나라 건국 직전의 남중국에서는 신사-향리층이라 불리는 토착 세력가들이 중앙이고 뭐고 상관없이 알아서 멋대로 놀고 있었다. 중앙을 우습게 여기는 풍토를 없애려면 어느 정도의 숙청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숙청을 통해 공신을 비롯한 신하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았고(ex. 남옥의 옥사 등), 외척 세력이나 환관들이 정치에 얼씬도 못하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으며, 각종 부정부패 근절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ex. 부마 구양륜 사사와 딸 안경공주의 처형 등)
명 태조의 출신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는 기아에 시달리던 최하층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원나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적떼에 가담하여 출세한 사람이었다. 이런 한미한 출신 배경으로 인해 설사 그가 탁월한 능력으로 난세를 평정하고 통일 왕조를 개창하여 강력한 정치권력을 틀어쥐었다 하더라도 기존 지배계층이 진정으로 새 왕조를 존중하고 이에 충성한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명 태조는 이들을 숙청함으로써 견제하고 취약할 수 있는 새 왕조의 권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과장된악명
명 태조는 과거 불우했던 시절에 대한 개인적인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기도 했으며, 이것이 숙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예를 들어, 탁발승 시절과 도적 시절은 주원장의 대표적인 역린이어서 주원장은 그 시절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했고, 승려 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 자를 쓰거나 '승려 승(僧)' 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 자를 쓰는 행위, 도적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 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반박된 사례다. 주원장의 공신에 대한 대규모 숙청은 분명 존재했지만, 문자의 옥을 저질렀다는 것은 후대에 창작된 설화라는 것이다.
가령 <閒中今古錄>에 따르면, 원말~명초의 학자였던 장청고(蒋清高)는 홍무 17년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즉, 문자의 옥에 연루되어) 죽었다고 나와있는데, 정작 장씨네 족보인 <蒋氏谱>에서는 장청고가 홍무 9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초기의 고승이었던 来复는 주원장에게 시를 바쳤다가, 트집을 잡혀서 죽고 시는 불태워졌다고 하는데 정작 그 시는 <皇明雅颂>에 고스란히 실려 전해지고 있고, <补续高僧传>와 <继灯录>에서는 호유용 사건에 연루되어서 죽었다고 명시된다.
다음과 같은 설도 있다. 항주의 유생 서일기(徐一夔)가 올린 하표에 '광천지하(光天之下), 천생성인(天生聖人) 위세작칙(爲世作則)'이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주원장은 '승려 시절을 수치스러워해 빛날 광, 대머리 독, 승려 승, 승려 승과 발음이 비슷한 생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서일기를 참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후대에 창작된 악명에 불과하다. 일단 학자 진학림(陈学霖)의 연구에 따르면 서일기(徐一夔)는 주원장 생전에 죽기는커녕 오히려 천수를 누리다 건문제 시기인 1400년에 항주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정말 서일기가 홍무제 치세 내에 죽었다면 실록이나 명사에 적혀 있어야 하는데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서일기가 직접 쓴 <故文林郎湖广房县知县齐公墓志铭>라는 비문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저 비문은 1399년에 작성된 것인데, 주원장은 1398년에 이미 죽었기 때문.
뿐만 아니라 주원장은 자신의 승려 시절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았다. 이는 홍무제가 직접 쓴 자신의 아버지 주세진의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명 황릉의 비문 효자 황제 원장이 삼가 기술하다. 홍무 11년 여름 4월, 강음후 우량에게 명하여 황당을 건축하게 하였다.
내가 그때 거울을 들여다보며 형체를 살폈지만, 회색 머리와 백발만 보일 뿐, 문득 옛날의 고난이 생각났다. 더욱이 황릉 비문은 모두 유신들이 아름답게 꾸민 글이라, 후세 자손에게 경계가 되지 못할까 두려워 특별히 고난과 창성한 운명을 기술하여, 세대가 그것을 보게 하였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옛날 내 부왕께서 이 곳에 거주하셨는데, 농사는 고되고, 아침저녁으로 방황하셨다. 이윽고 천재지변이 유행하여 가족이 피해를 입었고, 황고는 64세에, 황비는 59세에 돌아가셨다. 맏형은 먼저 죽고, 온 집안이 애도를 지켰다. 토지주는 나를 돌보지 않고, 큰소리로 나를 꾸짖었으며, 땅도 주지 않아 이웃들은 서운해했다. 갑자기 형의 관대함으로 이 황토를 얻게 되었다. 장례에는 관도 없고, 몸에 걸친 옷도 형편없었다. 흙을 덮어 세 발만큼 높이 쌓고, 어떤 음식이나 술을 올릴 수 있었겠는가. 매장한 후, 집안은 불안정했다. 둘째 형은 어리고 약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고, 맏형수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늘은 비가 오지 않고, 메뚜기가 날아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먹을 것이 부족해 풀과 나무를 먹었다. 나에게 무엇이 있으랴, 마음은 미치도록 놀랐다. 그래서 형과 상의하여, 어떻게 상황을 유지할까.
형은 이곳을 떠나 각자 기근을 견뎌내자고 했다. 형은 나를 위해 울고, 나는 형을 위해 슬퍼했다. 황천의 백일하에, 눈물이 심장을 끊었다. 형제가 함께 길을 가며, 슬픔이 먼 하늘에 닿았다. 왕씨 노모는 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아들을 보내 향기로운 술을 준비하게 했다. 승려의 문을 드나들며 불법을 행했다.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절주가 곡식을 봉인했다. 모두가 각자 계획을 세우고, 구름과 바람에 흩어졌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아무 재주도 없었다. 친척에 의존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하늘만 바라보며 막막했다. 의지할 곳이 없으니, 동무의 그림자를 따라, 새벽엔 연기를 향해 급히 나아가고, 저녁에는 옛 절에 다가가 비틀거렸다. 하늘의 절벽을 바라보며 푸른색에 기대고, 원숭이 울음소리와 달빛에 슬퍼하였다. 혼자서 부모님을 찾아 헤매며, 의지가 사라지고 의협을 베풀었다. 서풍에 학이 울고, 이내 추위가 내리며 날아갔다. 몸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멈추지 않고, 마음은 끓는 국물처럼 요동쳤다.
위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 주원장은 자신의 승려 생활을 수치스러워하긴커녕 직접 비문에 새겨 똑똑히 명시하고 있다. 정말 승려 생활을 수치스러워 했다면 비문, 그것도 아버지의 묘비에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원장이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면 그게 어떤 형식으로든 실록에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청나라의 사례처럼. 그러나 명실록과 명사 어디에도 주원장이 특정 글자를 쓰지 말라고 칙령을 내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공신에 대한 대규모 기획숙청은 했을지언정, 글자로 꼬투리 잡으며 무차별 폭격은 가하지 않은 셈.
그러나 어찌됐든, 초기의 숙청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숙청은 잦아지고 그 정도 역시 가혹해져 갔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숙청당했다. 이는 분명한 비판점이다. 공신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 훗날 과장된 악명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렇게 신하를 잔혹하게 다루는 풍조는 영락제도 마찬가지, 아니 더 심했다. 그나마 이후에는 정치적 필요성이 있다고 쳐도 연좌는 자제하고 적당한 범위 내에서 숙청을 하는 식으로 좀 완화되긴 했으나 그래도 숭정제가 원숭환의 무고 건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능지처사하는 등 다른 건 몰라도 정치적 숙청과 관련해서는 경태제, 태창제처럼 뭔가를 할 시간이 전혀 없었거나 천계제처럼 정말 어딘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황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니면 명 황제들이 명군과 암군, 성군과 폭군 할 것 없이 자유로운 사람들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후계자 문제
원래 장남인 주표가 황태자로 책봉되어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었으나, 주원장은 넷째 아들인 주체에 대한 호감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주원장은 공신들을 탐탁찮게 본 반면, 그에 대한 반발 심리였는지 태자는 공신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며, 상당히 유약한 성격이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래도 후계자를 갈아버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태자가 일찍 사망한 뒤에도 주체가 아닌 적장손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봉하여서 계승 원칙을 계속 지키려 노력했다. 명나라를 건국한 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에서 황실의 정통성 문제는 매우 중요했으므로,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려 한 홍무제의 의도 자체는 옳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정말로 장자 계승을 확립하려는 사람 치고는 실책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했는데, 바로 황자들을 번왕으로 책봉하여 각 지역에 보낸 것이었다. 번왕들은 백성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진 않고 국경 수비만 맡았지만 그래도 소규모나마 군사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장수들을 보내면 자기들끼리 군사를 키워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여 장수들 대신 아들들에게 맡긴 것인데, 국경 수비 지휘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인망 있고 유능한 황실 적자가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 과연 무슨 짓을 할까? 역사적으로 번왕 제도는 사후에 제위 계승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게 했다면서 일부 신하들이 이를 거두어주도록 요청하였지만, 주원장은 주청한 신하들을 족치고 그대로 강행하였다. 결국 주체에 의해 이 문제가 현실화되면서, 나중에는 가까운 황족들에게는 봉토를 적게 주거나 아예 주지 않는 친왕 제도로 바뀐다.
물론 주원장은 아들들을 모아놓고 '늬들을 임명하는 것은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이야기 역시 사실이니까, 마음 깊이 잘 새겨두고 나중에 형의 핏줄이 계승한 중앙 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라.'면서 은근한 협박 기술을 시전하였다. 그리고 딴에 대비를 안 한 건 아니라서 나이도 많고 비교적 황위에 가장 가까운 둘째 진왕(秦王) 주상, 셋째 진왕(晉王) 주강, 넷째 연왕(燕王) 주체까지의 봉지는 시안 - 타이위안 - 베이징 순으로 붙어 있게 하여 한쪽이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다른 둘이 견제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주상과 주강이 먼저 죽어버렸다.
이러니 당장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건문제는 군사력을 가진 숙부들에게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중 건문제의 숙부 가운데 가장 항렬도 높고 실력도 있는 연왕 주체는 가장 큰 경계의 대상이었다. 결국 번왕 숙청 프로젝트가 가동되자, 연왕 주체에게는 가만히 있다가 죽기 vs 어차피 죽을 거 반란 한번 일으켜보기 외의 선택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락제 입장에서 무고한 조카의 제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억울했을 것이다.
결국 의문태자 주표는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의 막나가는 숙청으로 인해 마음 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라 4남 주체가 태자로 책봉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대두되었지만, 장자 계승 원칙을 지켜 적장손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지명하였다. 이로 인해 연왕으로 책봉되어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던 주체가 상당히 격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모습은 주원장이 시골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는 훈훈한 인정미가 넘치는, 이른바 시골인심을 보여주지만 외부인들에 대하여는 어떠한 짓을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골 사회의 특성이 황족 우대/공신 박대라는 주원장의 모습에 상당히 맞물린다는 것이다.
홍무제의 조치
홍무제는 의외로 정교하고 세심하게 후계 문제를 설계했다. 그의 구상 속에서 번왕들은 중앙을 대리해 각지의 위소를 관리하는 하청이자, 황조 존속을 위해 안배된 여벌의 존재들이었다. 게다가 북원의 잔당이 남아 있어 누군가는 북방의 병권을 틀어쥐고 있어야 했다. 남경에서 만리장성까지 가히 천 리가 훌쩍 넘는 물리적 거리는 홍무제가 아니라 누구였어도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었다. 결국 누군가에게 병권을 쥐어줘야 한다면 신하가 아니라 친족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들들을 아예 숙청해버릴 수도, 섣불리 그들에게 실권을 주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홍무제는 일단 아들들에게 어느 정도 실권을 주되 철저히 중앙의 힘을 키워주는 방안을 택했다. 일단 명나라의 번왕이 가진 봉지는 오초7국의 난과 비교해 터무니없이 작았다. 각지의 번왕이 휘두를 수 있는 병권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특히 화북에는 서달의 아들이었던 서휘조를 배치하여 병법에 능한 아들들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휘조는 서달로부터 병법을 배워 북원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중군도독부의 도독으로서 산서, 하남, 북평, 산동의 병마를 조련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정난의 변 당시 영락제는 공신과 번왕 간의 상호 견제 속에서 북방의 병마를 모두 거머쥔 적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주원장은 과격한 숙청 속에서도 경병문과 곽영을 남겼다. 이들은 모두 1세대 공신들로, 천하통일에 공을 세우고 북벌에 나선 잔뼈 굵은 장수들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경병문은 진왕좌상도독첨사장흥후(長興候)로, 장사성 토벌에 종군하였고, 북벌에 나서 개봉을 함락 시켰으며, 서달과 함께 산서성을, 부유덕과 함께 운남 공략을 성공한데다, 북벌 당시 몽골 벨 호수까지 도달한 1세대 공신이자 명장이었다. 곽영은 주원장의 후비였던 영빈 곽씨 오빠로, 주원장과 탕화 밑의 부장으로 종군해 공 세운 바 있다, 곽씨는 마황후 사후 후궁을 관할했는데 이때 곽씨가 5살 된 건문제 친할머니 노릇을 했다. 즉, 그 오라비인 곽영은 외척이자 군부의 중요 인물이었다.
이들이 모두 건문제의 편인데다, 명나라군은 북벌을 성공시킨 최정예였다. 상식적으로 이 전력을 쥐고 있는데 패배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정난의 변 당시, 10명이 넘는 번왕들이 모두 주체가 패배할 것이라 예상하고 건문제에게 복종했다. 오직 영왕만이 울며 겨자먹기로 영락제를 따라 동참했을 뿐.
즉, 건문제의 패배는 할아버지를 탓할 게 아니라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에 가깝다. 정난의 변이 궐내나 수도에서 일어난 쿠데타라면 홍무제의 설계가 완전히 틀려먹은 것이겠지만, 정난의 변은 북방의 일개 세력이 중앙 조정에 대항하고 일어난 내전의 양상을 띠었다. 문제는 그 내전의 무게추가 완전히 조정에게로 쏠려 있었던 것.
정난의 변 당시, 영락제에 호응한 병력은 극히 미미했고, 그는 눈부신 전공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몰려드는 병력에 압사 당할 지경까지 간다. 번왕에게 실권을 주되, 중앙의 힘을 키워 균형을 이룬다는 홍무제의 설계는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잘 작동한 것이다. 결국 그의 구상을 무너뜨린 것은, "짐이 숙부를 죽였다는 책임을 지게 하지 마라." 손자의 이 한 마디였다.
또한 황자들(즉 차기 황제나 차차기 황제의 형제, 숙부나 백부들)에게 어느 정도의 세력을 허용해야 하는지는 원래 답이 없는 문제다. 제위 계승의 안정성과 정통성을 생각하면 황자들에게 세력(특히 군사력)을 가질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좋지만 대신 이 경우 황족의 세력이 미약해져서 그만큼 황가가 취약해지는 것. 세력을 가진 황족들은 황가 내부적으로는 황제에 대한 위협이 되지만 반대로 황가 외부에 대해서는 황제의 권위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진의 경우 황족인 사마씨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여 세력을 구축하게 한 탓에 황족 사이의 권력 분쟁인 팔왕의 난으로 멸망하였지만 반면 그 전 왕조인 위(삼국시대)의 경우 조비 이후 황족인 조씨가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성장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억제한 탓에 조방의 즉위 이후 사마씨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제위를 빼앗기고 만 것.
만약 조조의 후손들이 군사력과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마의가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시도했다 하더라도 제압 가능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물론 황통과 거리가 있는 황족의 경우 친황 세력으로써 조조 시절부터 쭉 푸쉬를 받았지만, 사마씨의 정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으며 빼박으로 그 친황 세력 중에서도 하후화처럼 사마씨에 붙은 족속들도 있었다. 즉, 황가의 세력이 미약해질 경우 권신의 발호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생기는 것이다.
애초에 서진 자체가 이를 거울삼아 황가의 세력을 의도적으로 키워주다가 그 부작용으로 망한 것이기는 하지만. 요컨데, 중요한 것은 한쪽 노선에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괜히 한국 역사 커뮤니티에서 전근대 왕조의 흥망성쇠를 논하며 홍대용의 위나라와 진나라간의 비교 평가가 주목받는게 아닌 것이다.
따라서 차기 황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황자들이 세력을 가지는 것은 곧 자신의 황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의 요소가 되지만 왕조 전체, 또는 왕조 창시자의 입장에서 보면 의외로 나쁜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황족들끼리 권력분쟁을 벌여 황제가 갈린다고 하더라도 어쨌건 새 황제 역시 황족, 즉 왕조 창시자의 후손이기는 마찬가지니까. 물론 주원장의 입장에서도 자기 자식이나 후손들이 서로 싸우고 죽여대는 것이 달가운 일일 리는 없고,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될수록 국력의 약화나 정통성의 실추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도 발생하겠지만. 어쨌건 왕조 자체의 존속이 목적이라면 황자들이 세력을 구축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얻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는 것. 어쨌거나 정난의 변 이후 등극한 영락제 역시 주원장의 아들이므로 왕조 자체는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 왕조의 권위가 불안정한 개국 직후, 게다가 빈민 출신으로 가문의 세력과 명망 역시 변변찮은 상황이었던 주원장의 입장에서는 일단 자식들에게 군권을 맡김으로써 주씨 왕조의 기반 자체를 튼튼히 다져야 한다고 판단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주원장의 최초 복안이었던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이 실패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왕조 자체의 유지'는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보다 더 상위의 목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원장이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을 위해 정말 황자들을 숙청하거나 정치적으로 무력화했다면 정작 건문제가 즉위한 이후 숙부가 아닌 다른 권신들에 의해 황위를 위협받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왕조 창시자의 입장(즉, 자기 왕조가 혈통적 정통성이 아니라 힘과 실력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자기 스스로 잘 알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던 주원장의 입장이라면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