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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600년 된 한국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성 '낙안읍성'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성곽.

성곽 안에는 '낙안민속마을'이라고 하여 민속촌이 위치해 있는데, 단순한 전시용 민속촌이 아니라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안동 하회마을, 경주시 양동마을 등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전통적인 촌락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마을이다. 다만 집에 보일러 등의 기계를 설치하는 데 제한이 있고 관광객에 의한 사생활 침해 등으로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기도 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순천도호부와 별개의 고을이었던 낙안군(樂安郡)의 관아가 소재했던 곳이었지만, 어떠한 이유로 인해 1908년 낙안군을 폐군하고 둘로 나눠 현재의 벌교읍에 해당하는 지역을 보성으로, 읍성을 포함한 나머지 지역은 순천으로 편입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리하여 낙안은 지역의 중심지 기능을 잃고 그저 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전형적인 촌이 되어버렸으나, 읍성 주변이 개발되지 않고 오히려 원 모습을 더 잘 보존하여 시간이 지나 관광지로 가치를 얻었으니 아이러니한 일. 비슷한 사례로 매립해서 공단을 유치하려고 했다가 주민 간의 갈등 끝에 그냥 보존하기로 결정한 순천만도 있다.

다만 낙안읍성 내부의 전시시설에서 '낙안'을 낙안면으로만 한정하고 있고, 조선시대의 낙안군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한국지리를 선택한 수험생들은 반드시 알아두도록 하자. 낙안읍성이 순천의 주요 명승지로 많이 언급되고 실제 수능 출제도 되고 있다.


조선 태조 6년(1397년)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토성을 쌓았고, 이후 세종 9년 (1426년)에 방어를 보강하기 위해 석성으로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를 역임하던 시기에 현재의 성읍을 구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이는 군수 시절에 석성을 개축한 사례와 주민들의 임경업에 대한 존경심이 복합되어서 만들어진 야사로 추정한다.

100채에 육박하는 초가집과 옛 성곽, 낙안군 동헌(군청)과 객사 등이 남아있고, 성 바로 옆에는 1970년대에 발행되었던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창간자 한창기 선생의 소장품들이 전시된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이 있고, 또한 멀지 않은 곳에 국립 낙안민속자연휴양림도 있어서 이색 관광지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