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예.스포츠.TV

'너바나' 커트 코베인이 자살한 이유

미국의 전설적인 음악가 그런지 락 밴드 너바나의 프론트맨이었다. 생전 너바나에서는 작곡, 작사, 기타와 보컬을 담당했다. 그의 등장과 함께 메탈이라는 장르 자체가 퇴조하였고 얼터너티브 록이 록의 주류 장르가 되었으며, 음악적인 영향력은 정말 지대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서 더욱 발전한 음악적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고 젊은 나이인 27세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코베인은 1967년 2월 20일, 미국 워싱턴 주 에버딘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스스로도 '중산층인 척 하는 화이트 트래시'동네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코베인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는 전기의 후기에서 그의 워싱턴 주 애버딘 생가를 취재한 뒤 '비교적 가난하다고 알려진 엘비스 프레슬리의 집도 커트 코베인의 집에 비하니 대궐같다'는 표현을 했을 정도였다. 커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 웬디는 19살, 아버지는 21살에 불과했고 부모님은 커트가 9살 되던 해에 잦은 마찰과 다툼으로 이혼하게 된다. 부모님의 이혼 후 코베인은 아버지를 증오하였고 이로 인해 죽을 때까지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그의 우울증은 선천적인 영향과 후천적인 영향 둘 다에 기인한다고 보는 게 맞는다.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적인 건강 문제는 그의 양가에 두루 존재하였으며 그의 친척들 중 몇 명은 자살을 기도했거나 혹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살하였다. 그의 외증조부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해를 하다가 병원에서 죽었으며 다른 두 명의 삼촌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또한 그와 함께 밴드를 꾸려온 멤버들과 올림피아 그리고 시애틀의 록 씬 대부분의 펑크 로커들은 커트처럼 가난했고 이혼으로 얼룩진 인생을 헤쳐나왔다. 당장 절친이자 같은 밴드에 속해 있던 크리스 노보셀릭도 부모의 이혼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지고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은 사실 그 바닥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인터뷰 중 기자가 커트 코베인에게 '스스로의 인생이 슬프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커트는 "자신은 그저 미국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산물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던 적도 있다.

그의 사진집 겸 기록물인 'Cobain unseen'에서는 어렸을 때 동네 친구의 형이 산속에서 목을 매 자살한 시체를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들이 현장에 올 때까지 몇 십분 동안이나 그 기괴한 현장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그의 성격, 불우한 가정환경, 이러한 충격적 장면을 본 기억의 잔재 등이 그의 곡이나 특히 가사에 많이 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커트 코베인에게 자살과 우울증은 그리 먼 대상이 아니였던 것이다. 생전 그는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였는지 혹은 특별히 의도했는지 몰라도 인터뷰에서 본인의 성장 이야기를 말할 때 사실과 허구를 섞어서 모호하게 표현하곤 했으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 중에는 사실이 아닌 것들도 일부 있다고 한다.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서 가출하기도 했으며 가출한 동안에는 친척과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살기도 하고 노숙을 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양아치라며 급우들과 선생님에게 배척받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청소년 시절부터 그는 대마초, 술, 담배 등에 빠져서 심각한 중독 수준에 이르렀고, 동시에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가 차차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처음 배운 악기는 드럼이었다고 한다.



이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훗날 얼터너티브 록밴드 Melvins로 음악사에 족적을 남기는 다른 멤버들과 fecal matter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1년 남짓 활동한다. 이 때 녹음한 Illiteracy Will Prevail라는 이름의 데모 테이프는 지금도 유튜브 등에서 풀버젼을 찾아볼 수 있다.



1987년, 마침내 커트 코베인은 자신을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과 함께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에서 너바나를 결성했고 2년 후인 1989년 데뷔 앨범 Bleach를 발매한다. 인디 시절, 커트 코베인은 동료 뮤지션들 사이에서 최소 하루 9시간 이상은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는 정열적인 음악인으로 유명했다. 또한 당시 커트는 자신의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연 중에는 금주, 금연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금연을 요구했다고 한다.

Bleach는 언더에서 발매한 앨범치고는 차트에도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너바나는 많은 라이브 공연들과 미국 투어들에 힘입어 언더 씬에서 확고한 팬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이미 시애틀을 넘어선 언더그라운드 록의 기대주가 되었고, 그 잠재력을 밴드 멤버나 외부의 많은 레이블들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90년에는 첫 앨범 Bleach의 드러머였던 채드 채닝을 해고하고 데이브 그롤을 새로운 드러머로 영입했다.

한편, Sub Pop으로부터 실력에 비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 커트와 크리스는 이때부터 미 전역 및 전세계에 음반 배급망을 갖춘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기를 원했고, 많은 유명한 메이저 레코드 레이블들이 너바나와 계약하기 위한 물밑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커트 코베인이 존경하고 교류가 많았던 소닉 유스의 서스턴 무어의 권유로 당시 소닉 유스도 속해 있었던 게펜 레코드의 산하 레코드인 DGC(David Geffen Company)와 1991년 초에 계약을 맺고 소닉 유스의 멤버 킴 고든의 추천을 받아 LA에 있는 사운드 시티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 부치 빅과 메이저 데뷔 앨범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믹싱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작곡 하며 녹음을 했고 이 녹음본은 "다듬어지지 않은" 사운드를 추구하는 커트 코베인조차 사운드가 지나치게 거칠게 느껴져 앨범의 완성도를 해칠까 걱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부치 빅이 동료 프로듀서 앤디 월레스와 함께 녹음물을 손 본 마스터 테입을 들려주자 커트 코베인은 결과물이 너바나의 다듬어 지지 않은 음악이 아닌 너무 "깔끔한 팝송"이 되었다고 경악했다고 한다. 커트는 Nirvana의 정체성을 어디까지나 펑크 록 밴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렇게 완성된 앨범에 대해 불만을 품었지만 가난에 지쳐 사회적 성공을 원했기에 앨범이 발매되자 매니저 앞에서 왜 MTV에 앨범의 첫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의 뮤직비디오가 자주 나오지 않냐고 불평했을 정도로 밴드의 유명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조지프 히스의 '혁명을 위하여'는 이러한 코베인의 자기모순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Smells Like Teen Spirit의 대박 히트 후 대중들과 평론가들은 Nevermind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앨범이라는 식으로 호평들을 하기 시작했지만, 커트는 자작곡들이었어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운드로 밴드가 성공한 것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밴드가 <Smells...>만이 히트한 원 히트 넘버 밴드로만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에 우울해 하며 점점 음악에 흥미를 잃어갔다. 다만, Nevermind 수록곡들 대다수는 90년대에 매우 유명했다.

한편, 언론에서는 동성애 인권 옹호주의자이지만 이성애자인 커트를 그의 중학교 시절 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양성애자로 몰아가는가 하면, 커트가 낙태를 찬성한다는 발언을 하자 부부가 심각한 마약 중독자라 기형아가 태어날 확률이 굉장히 높은데도 낙태를 하지 않고 프렌시스 빈 코베인을 낳았다는 이유 등으로 까댔다. 커트 코베인의 지인들도 커트가 밴드의 성공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자 "무명 시절에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예술적인 재능이 없는 장사꾼이다"라면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까던 사람이 성공하니 엘비스처럼 행동한다며 그를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불우한 주변 환경은 그로 하여금 약물에 대한 탐닉을 다시 일으켰다. 특히, 헤로인 중독이 심했다. 그러나 커트 코베인은 록씬에서 유명한 헤로인 중독자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약중독자라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굉장히 꺼렸고 그를 약물중독자라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몹시 싫어하였다. 때문에 인터뷰에서 매번 자신이 마약 중독자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약문제는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적이 여러번 있었다. 사망하기 고작 1달 전인 1994년 3월 로마에서 헤로인을 투여하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후송되기까지 했다. 그의 자살은 헤로인 중독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커트는 죽기 직전 아내인 코트니가 자신과 결혼한 후에도 전남친인 빌리 코건과 밀회를 즐기는 등 여러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MTV UNPLUGGED 라이브에서 부른 마지막곡,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이 자신이 빌리 코건의 약혼녀였던 코트니를 가로채서 결혼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과 코트니가 다른 남자들과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의 분노 등이 담긴 코베인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 외에도 그는 선천적이라 할 수 있는 조울증과 더불어 복통과 척추측만증을 비롯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렸다. 죽기 직전의 인터뷰에서 커트가 위장 수술을 받았다는 언급이 있었는데 수술을 받은 뒤, 커트는 주위 사람들이 그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만족해했다고 한다. 코트니가 위장병으로 괴로워하는 커트에게 진통제로 헤로인을 사용해보라고 권유했다고도 하는데, 일부 팬들은 이를 코트니 타살설의 증거 중 하나로 거론하기도 한다.





새로 나온 음반 In Utero가 대중음악계에 레전드를 쓴 전작보단 덜하지만 그래도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밴드 해체의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1994년 4월 5일, 커트 코베인은 약물중독 요양소에서 탈출한 후, 헤로인을 치사량으로 맞은 뒤 Auto-5 산탄총으로 머리를 쏴서 자살하는 실로 충격적인 최후를 맞았다. 인터넷에 나오는 시체 사진을 보면 머리가 턱만 남고 윗부분이 다 날아간 처참한 모습이다. 그가 자살한 방에는 Automatic for the People라는 앨범이 틀어져 있었다고 한다. 인기와 명예의 정점에서 27살의 젊은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은 미국 락씬을 넘어 전 세계 음악계에 엄청난 충격과 비통함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그의 죽음을 베르테르 효과를 우려해서 조심스럽게 방송했으나 몇명의 청소년들이 자살했고, 프랑스에서도 자살한 팬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락카페에서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팬들이 울면서 너바나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일부 팬들은 그의 죽음에 관한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자살 직전의 미공개 인터뷰에선 너바나를 해체하고 너바나와 정반대인 포크 장르로 솔로 앨범을 내거나 아내 코트니의 밴드 홀에 가입할지 말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 이후 반응이 다양한데, 록스타들은 대부분 슬퍼하는 분위기였고, 유서에 자신의 곡 Hey Hey, My My (Into the Black)의 구절이 인용된 닐 영과 데이브 그롤이 몸담고 있는 푸 파이터즈는 각각 <Sleeps With Angels>와 <Friend of a Friend>라는 추모곡을 쓰기도 하였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코베인 사망 이듬해 발표된 6번째 앨범 One Hot Minute 9번째 트랙 Tearjerker란 곡으로 커트를 추모했다. 힙합씬에서는 노래에 그의 죽음을 소재로 한 문장을 집어넣기도 했다. 라이브 퍼포먼스와 정규 2집에서 적극적으로 락을 차용한 MGK의 경우 "코베인이 돌아왔다(Cobain is back)"라는 문구로 자신을 대변하기도 했다.





2015년 1월 24일, 그의 생전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제목은 Kurt Cobain: Montage of Heck이며 감독은 브렛 모르겐이다. 코트니 러브가 최초의 아이디어 제공자라고 하며, 그의 딸인 프란시스는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커트 코베인을 소재로한 영상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족이 제작에 참여한 사례라고 한다. 특이하게도 몇몇 장면은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했다고 한다. 5월 4일에는 HBO를 통해서 TV로도 방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