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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미국판 성수대교 '실버 브리지 붕괴사고'

 

1967년 12월 15일 미국 오하이오 강의 실버 브리지가 무너진 사고.


실버 브리지는 1백만 달러를 들여 1928년 5월에 건설을 시작해 1928년에 완공된 530m 길이의 대교로, 53번 국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다리 옆에는 철교가 따로 있어 두 다리가 오하이오 강을 가로지르고,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포인트 플레선트(Point Pleasant)와 오하이오주의 갈리폴리스(Galipolis)를 이어줬다. 다리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은색 빛을 띄었는데, 그래서 다리 이름을 실버 대교라 지었다. 다리는 두개의 큰 기둥을 기반으로 지어진 트러스트교로, 다리가 그 사이에 연결된 형태였다.

다리를 디자인한 사람은 American Bridge Company의 John Edwin Greiner였는데, 원래는 만들면서 기둥과 트러스트교를 잡아줄 역할로 강철 케이블을 쓰려 했으나, 돈 문제로 아이바 체인을 사용했는데, 쉽게 생각해서 자전거 체인에서 체인 길이를 엄청 늘린 것이라 보면 된다. 만드는데 쓰인 아이바의 두께는 2인치(5cm), 길이는 16m와 13m 짜리 이렇게 2개였다. 또 일반적으로 아이바 체인을 쓸 때는, 아이바 여러개를 겹치고 연결해야 했으나, 실버 대교의 경우 2개씩만 연결했다. 문제는, 아이바 공법은 아이바 하나가 끊기면 다른 아이바들이 막아주는 형식으로 붕괴를 막았는데, 2개만 연결하면 남은 1개가 다리의 무게를 버텨야 했기에 매우 위험한 방식이었다.

만들어질 당시엔 차량 자체가 그리 무겁지 않았으나, 시대가 지나면서 차량도 발달했고, 차량들도 그만큼 많이 무거워졌다. 다리 제작 당시 일반적인 승용차였던 포드 모델 T의 무게가 680kg, 가장 무거운 트럭이 9톤이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승용차는 평균 1.8톤으로, 트럭은 최대 27톤으로 무게가 무거워졌다. 또 다리가 처음 지어질 때는 도로를 나무와 아스팔트로 만들었으나, 1940년대에 들어서야 철근 콘크리트로 바꾸었다. 그렇게 다리는 아슬아슬한 상태로 유지되면서 점차 무거워지는 차량들을 간신히 버텨내야했다.



사고 당일 오후 5시 경, 러시 아워 시간대라 차가 몰리는 가운데, 다리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아이바 하나가 끊어졌다. 3mm 정도의 작은 금이 가있었는데, 39년간 이어진 충격을 버티다가 결국 이 작은 금이 옆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다리와 차량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진 것이다. 그렇게 아이바 하나가 끊어지고, 뒤 이어 수많은 아이바들이 끊어지더니 철근이 휘고 결국 다리 전체가 무너졌다. 목격자 중 한명은 "카드 탑이 무너진 것 처럼 다리가 무너졌다." 고 회상했다.

사고 당시 임신한 상태였던 샤를린 우드는 다리가 흔들리는 걸 느끼고 재빨리 차량을 돌려 빠져나왔다. 하지만 차량 32대는 미처 피하지 못한채 섭씨 6도의 차가운 겨울 강으로 떨어졌다. 신고를 받고 구조대가 출동했다. 구조대는 보트를 끌고 와 강에 떠내려가던 사람들을 구조했다. 그렇게 21명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이 중 9명은 중상이었다. 46명은 목숨을 잃었다. 잠수부와 바지선이 동원되어 강 밑으로 가라앉은 차량과 시신을 최대한 찾아냈으나, 2명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사고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교량 사고로 기록되었다.



사고 이후 같은 방식으로 지어진 다리들을 검사했는데, 몇몇 다리는 아예 철거하고 다시 지어야 했다.

1969년, 다리가 다시 지어졌고, 다리 이름은 실버 매모리얼 브릿지가 되어 희생자를 기리고 있다.

포인트 플레선트에는 현재 사고를 기리는 추모비가 설치되어있다.

사고 50년 후, 실버 브리지 조각이 강바닥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여담으로 사고 당시 모스맨을 목격했다는 루머가 떠돌았고, 관련 괴담도 많이 떠돌았다. 모스맨 하면 함께 나오는 "모스맨이 목격된 다리가 무너졌다." 에서 말하는 다리가 무너진 사고가 바로 이 사고다. 실제로 실버 브리지가 연결해주던 마을인 포인트 플레선트는 모스맨으로 유명한 곳으로, 해마다 모스맨 축제가 열리며, 미스 모스맨을 선발하기도 한다.